컨텐츠 바로가기

사설 및 칼럼

자재·인부까지 본국서 공수···국내서 가장 큰 中 대사관

[논설위원이 간다] 남정호의 '대사관은 말한다'
골리앗 같은 중국 대사관 …옛 청군 주둔지로 돌아오다  
중국식 벽돌색 지붕에 주변 건물보다 훨씬 높은 24층의 중국 대사관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014년 초 대사관 개관식 때의 모습. 최승식 기자

중국식 벽돌색 지붕에 주변 건물보다 훨씬 높은 24층의 중국 대사관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014년 초 대사관 개관식 때의 모습. 최승식 기자

 한때 중국말이 더 흔하게 들렸던 서울 명동 거리를 걷다 보면 주변보다 훨씬 높고도 독특한 건물이 눈에 띈다. 국내 외국 공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24층짜리 중국 대사관이다. 이 웅장한 건물은 아이보리색 대리석 벽에 벽돌색 기와지붕이어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 다른 공산권 공관이 그렇듯 이 대사관 내에도 직원 숙소는 물론 수영장에 연회장까지 갖춰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청나라에 이어 대만·중국과 한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는 역사가 배어있다. 건물의 특징과 함께 국제 관계의 싸늘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중국 공관의 변천사를 알아봤다. 

24층 건물로 단연 국내 최대
러 대사관보다 40% 이상 커

공관 내 직원 숙소 52채 구비
보안 위해 중국 회사가 공사

한·중 수교 후 대만대사관 차지
"중국식 지붕 위화감" 비판도

 
붉은색 문이 인상적인 서울 명동의 중국 대사관 정문. 최승식 기자

붉은색 문이 인상적인 서울 명동의 중국 대사관 정문. 최승식 기자

서울 강북 내 '쇼핑과 패션 1번지'로 통하는 서울 명동. 명성에 걸맞게 이 지역 초입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의 대형 패션몰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건물 옆 작은 길로 접어들면 오랜 전통의 중국 음식점들과 함께 높다란 중국 대사관의 담벼락과 붉은 대문이 나타난다. 옛날보다는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한 때는 국내에서 가장 잘나갔던 명동 차이나타운이다. 연희동·대림동·자양동 등 이제는 서울 곳곳에 신(新) 차이나타운이 들어서긴 했지만, 원조는 이곳이다. 명동이 차이나타운이 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여기에는 조선 시대 말 청나라 총영사관과 그 뒤를 이은 대만 대사관이 40여년 간 터 잡고 있었다. 그러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대만 대사관 건물과 부지는 중국 쪽으로 넘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새 공관이 들어서게 된다.  

24층짜리 숙소동에는 24~50평형의 직원용 아파트 52채가 마련돼 있다. 최승식 기자

중국 대사관의 특징은 무엇보다 높고 웅장하다는 거다. 연면적 1만7199㎡로 두 번째인 러시아 대사관(1만2012㎡)보다도 40% 이상 넓어 단연 국내 최대의 매머드급이다. 중국의 모든 해외 공관 중에서도 워싱턴 주미대사관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중국 외교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비중이 작지 않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대사관 건물은 로비와 연회장으로 꾸며진 2층까지는 한 몸이었다 이후 10층짜리 업무동과 24층의 숙소동으로 나뉘어져 올라간다. 2층까리 천정이 툭 틔여진 로비와 40석 규모의 연회장은 붉은색과 황금색 장식이 사용된 완연한 중국풍이다.
중국 대사관 1층 로비는 2층까지 천정이 뚫려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최승식 기자

중국 대사관 1층 로비는 2층까지 천정이 뚫려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최승식 기자

높이 90m로 대사관 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숙소동은 52채의 아파트로 이뤄져 있다. 24평형에서 50평형까지 다양하며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물론 고위직몫이다. 대사 관저도 이곳에 마련돼 있지만 꼭대기가 아닌 23층에 있다. 제일 높은 층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워 운동시설을 들여다 놨다고 한다. 이외에 실내 수영장, 분수대, 산책로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2015년 9월 중국 대사관 로비에서는 한국 학생들을 위한 태극권 시범 행사가 열렸다. 김성룡 기자

2015년 9월 중국 대사관 로비에서는 한국 학생들을 위한 태극권 시범 행사가 열렸다. 김성룡 기자

또다른 특색은 철통 같은 보안이다. 한·중 수교 이후 두 나라는 너무도 빠르게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다른 체제다. 게다가 한국은 중국이 가장 경계하는 미국의 동맹국이다. 당연히 중국도 건설 공사를 하면서 2001년 새로 대사관을 장만한 러시아 못지 않게 극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중국 업체에 공사를 부탁해 대부분의 자재를 본국에서 들여온 것은 물론 인부들까지 최대한 중국인을 썼다. 결국 일부 외장공사를 뺀 거의 모든 내부 공사는 중국의 힘으로 이뤄졌다.
이렇듯 서울의 최고 심장부에 웅장하면서도 보안이 철저한 중국 대사관이 들어서는데 대해 곱지 않은 눈길도 있었다. 외국 공관은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생각해 짓는게 보통인데도 옆 건물들을 압도할 정도 높은 데다 지붕도 중국식이어서 위화감을 준다는 비판이 나왔다. 내부를 전혀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높고도 꽉 막힌 담벼락도 시비거리가 됐다.  
그럼에도 신축 공사 때문에 11년 간이나 비어 있던 땅에 2013년 말 새 중국 대사관이 들어서면서 이 유서 깊은 중국인 거리가 훨씬 활기차게 된 것도 사실이다. 서울 명동 일대는 조선시대 말부터 차이나타운이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오래된 중국 음식점이 아직도 즐비하다. 게다가 중국인 자녀들을 위한 '한국한성화교소학교(韓國漢城華僑小學校·초등과정)'가 1909년부터 이 곳에 자리잡고 있어 국내 중국인들의 구심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최근에는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오면서 이 곳 명동은 또다시 차이나타운으로 거듭나는 느낌이다. 원래 중국 대사관 자리는 19세기 말 청나라 군대의 주둔지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한양으로 진주한 3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사들여 머물렀던 곳이 지금의 중국 대사관 자리다. 이후 군란이 평정되자 청나라는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한성 방위책임자를 남겨둔다. 나중에 중화민국 대총통까지 오른 위안스카이(袁世凱)이다. 
조선시대 말 사실상의 청나라 총독으로 행세했던 위안스카이의 모습. 중앙일보 사진DB

조선시대 말 사실상의 청나라 총독으로 행세했던 위안스카이의 모습. 중앙일보 사진DB

사실상 청나라가 파견한 조선 총독이었던 그는 이 곳에 총영사관을 지어 놓고 10여 년간 사용한다. 총영사관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패하면서 영사관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라 광복 후 1948년 정식으로 국교를 맺게 된 대만 정부가 이 곳을 대사관으로 쓰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대만 정부는 수교 이후 일제 시대 때 쓰던 중화민국 영사관 건물을 계속 사용하다 1960년대 본국에서 자재를 들여다 4층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국에 비해 대만의 기세가 약해지면서 이곳 대사관의 운명도 바뀌게 된다. 1992년 비밀리에 한·중 수교가 이뤄지자 대사관 건물과 부지가 전격적으로 중국 차지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 과정을 들여다 보면 국제관계의 비정함을 느끼게 된다. 당시 한국 정부는 중국과의 수교 발표 일자를 월요일로 잡고 대만 측에는 그 전주 금요일 오후 늦게 단교 사실을 통보했고 한다. 너무 일찍 알리면 대만 정부가 대사관 건물과 부지를 팔아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다. 그럴만도 했던 게 대만 대사관 부지는 명동 한복판의 최고 요지여서 1990년대 당시 돈으로도 5000억 원에 달하는 금싸라기 땅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옛 대만 대사관이 중국으로 넘어가 오성홍기(五星紅旗)가 걸렸다.

어쨌거나 이같은 곡절 끝에 대만 대사관을 넘겨받은 중국 정부는 기존의 4층 건물이 너무 좁다고 판단해 신축 공사를 계획하고 2002년 효자동으로 대사관을 옮겼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으로 공사가 미뤄져 2010년에야 공사를 시작해 3년 뒤에 완공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서 사들인 땅에 131년 만에 웅장한 중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중국 대사관은 근사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미묘한 한·중 관계 탓에 앞날이 늘 순조로울 것 같진 않다.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및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갈등 등 두 나라 간에 시비가 생길 때마다 각종 단체들이 대사관 앞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기 때문이다. 
2011년 12월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은 중국 대사관 앞에서 중국어선 선장의 해경 살해사건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강정현 기자

2011년 12월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은 중국 대사관 앞에서 중국어선 선장의 해경 살해사건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강정현 기자

특히 북한인권단체들은 지난달 중국이 탈북자 강제 송환을 중단하지 않으면 대사관 앞에 탈북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발표해 제2의 '위안부 소녀상'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DA 300

 


[출처: 중앙일보] 자재·인부까지 본국서 공수···국내서 가장 큰 中 대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