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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및 칼럼

북한 인권 문제를 어찌할 것인가

(한겨레신문, 2018.7.4)

북한 인권 문제는 오랫동안 보수에 ‘전가의 보도’였다. 북한을 공격하는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사이 진보는 그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다 보니 이 문제를 외면하다시피 했다. 태영호 전 북한 공사의 책을 보며 진보의 그런 외면이 새삼스러웠다.

2016년 망명한 태씨의 <3층 서기실의 암호>를 읽다 보니 북한의 인권 실태가 심각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탈북자인 만큼 어쩔 수 없이 감추거나 부풀린 점이 있을 것이다. 한 사람 말로 실상을 정확히 아는 것도 무리다. 하지만 북한이 거주 이전의 자유부터 양심·사상의 자유, 결사·의사표현의 자유 등 보편적 인권들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로 보였다.

태씨의 동료나 주변 인물이 갑자기 수용소로 보내지고 가족은 야반도주하듯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럽에서 태씨와 동료가 함께 귀국명령을 받는데 한명은 숙청 대상이다. 둘은 누가 죄인이고 호송자인지 모른 채 평양행 비행기를 함께 탔다. 태씨의 소학교 친구는 김정일 사진으로 딱지를 치다 걸려 다음날 온 가족이 평양에서 쫓겨났다.

2000년대 초 귀국 선물로 양초가 인기였는데, 평양에 정전이 잦았기 때문이다. 1997년 덴마크가 아이들에게 주라며 보낸 치즈는 김정일의 군부대 선물로 둔갑했다. 김정은의 형일 뿐 아무 직위가 없는 김정철은 2015년 에릭 클랩턴 공연을 보러 런던에 와 하루 수천달러씩 탕진했다.

답답해서 이 문제에 오래 관심을 가져온 시민단체 인사에게 물었다.

―진보 쪽 북한 인권 운동이 있었나?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북한 인권만을 하는 보수와, 북한 인권을 제외한 인권 운동을 하는 진보 사이의 간극이 크다. 북한 인권만을 하는 건 정치적 이유 때문인데, 이를 경계하다 보니 진보는 주도권을 놓쳤다.”

―북한의 5개 수용소에 8만~12만명이 수용돼 있다는 보고서가 있다.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최소한 박정희·전두환 때의 불법구금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남한 내 난민, 소수자 문제 등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북한 주민의 인권에 눈감는 건 모순 아닌가?

“그런 지적들이 있다. 남한이 직접 북한에 인권을 제기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은 측면이 있다. 미국이 제기하고 남한이 풀어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북한 인권에도 일종의 ‘운전자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준비가 안 돼 있다. 이 문제를 제쳐놓은 것처럼 비쳐선 곤란하다.”

한 중견 학자는 “진보도 북한 인권의 심각성에 동의하지만 방법론은 신중히 하자는 쪽으로 진화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이 문제를 아예 꺼내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든 거론될 것이다. 국제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질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보수의 대결적 방식과 달리, 진보의 신중한 접근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권을 거론할 토대조차 없는 북한 체제의 연성화·정상화를 우선 추진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도적 지원을 늘리고 대화를 통한 인권 개선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사실 남북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 이상의 획기적인 북한 인권 개선책은 없다. 한반도에선 평화가 최대의 인권 운동일 수 있다. 대결의 악순환에서 인권이 설 자리는 좁다.

하지만 이런 거대 논리가 현재 진행형인 북한 주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변명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시대가 바뀌었는데 우리가 북한 인권을 금기시했던 오랜 타성에 젖어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봤으면 한다.

 

kcbaek@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1751.html#csidx6e10c36814cd031b06e8611ec446e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