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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및 칼럼

[박완규칼럼] 이산가족 상봉

(세계일보, 2018.8.9)

여름 휴가지인 강원도 속초의 청호동은 ‘아바이마을’로 불린다. 도심의 중앙동과 이어 주는 갯배로 유명하다. 6·25전쟁 때 생긴 마을이다. 청초호 앞 백사장에 함경도 피란민들을 태운 배가 몰려왔다. 한 발짝이라도 고향과 가까운 곳을 찾아온 것이다. 해일이 밀어닥치면 마을이 휩쓸려가므로 토굴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남자는 고깃배를 탔고 여자는 포구의 잡일을 하면서 고달픈 삶을 이어갔다.

지금도 음식점이 들어찬 골목 안쪽에 오래된 집들이 남아있다. 어디선가 망향가가 들리는 듯하다. 시인 이상국은 “우리는/ 우리들 떠도는 삶을 끌고/ 아침저녁 삐꺽거리며/ 청호동과 중앙동 사이를 오간 게 아니고/ 마흔 몇 해 동안 정말은/ 이북과 이남 사이를 드나든 것이다”(‘갯배 1’)라고 노래했다. 청호동 부근에 있는 수복기념탑에는 한쪽 팔에 보따리를 낀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 있다. 북측 피란민이 많은 속초에 잘 어울린다.

이들을 이산(離散)가족이라 부른다. 이산은 ‘헤어져 흩어짐’이란 뜻이다. 며칠간 남쪽에 피해 있으려다가 부모와 영영 길이 엇갈린 아들, 거동이 불편한 **를 남기고 왔다가 회한 속에 사는 자녀…. 우리의 현대사는 식민지·분단·전쟁에 따른 이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압록강 건너 만주로, 두만강 건너 연해주로, 현해탄 건너 일본으로 간 이들도 이산가족이다. 그래도 남북 이산가족의 사연이 가장 애틋하다. 헤어진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당사자의 문제일뿐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가 안고 있는 인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의 간절한 소망은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는 것이다. 모두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한다. 이산가족의 재회는 1964년 일본에서 처음 이뤄졌다. 1951년 함경남도 이원에 처자식을 두고 집을 나선 아버지가 북한 육상 대표선수로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딸을 극적으로 만났지만 10분도 채 안 돼 다시 이별했다.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돼 이산가족 상봉 방법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이 이뤄졌다. 평양에 간 남측 방문단 35명, 서울에 온 북측 방문단 30명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났다. 고령의 어머니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부녀는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다. 이들이 헤어질 때 버스 창을 사이에 두고 애처롭게 손을 내미는 장면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그 후 2000년에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시작돼 2015년까지 20차례 열렸다. 상봉행사를 통해 약 2만명이 헤어진 혈육을 만났지만 재상봉이나 서신왕래로 이어지지 않은 일회성 행사에 그쳤다.

열흘 뒤 2년 10개월 만에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린다. 4·27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선언에 따른 조치다. 20∼22일에는 남측 방문단 93명이 북측 가족을 만나고, 24∼26일에는 북측 방문단 88명이 남측 가족을 상봉한다. 우리 측 인원에는 101세 할아버지와 100세 할머니가 포함됐다.

이산가족 수는 점점 줄어든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겠거니 생각하다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에 상봉 신청을 한 13만여명 중 57%가 사망했고 생존자의 63%가 80세 이상 고령자다. 상봉 신청이 받아들여진 게 약 2000명에 불과하니 갈 길이 멀다. 더 이상 북한의 시혜적 태도에 의존해선 안 된다. 남북한 당국이 이산가족 인권보호 차원에서 접근해 전면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상봉 방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만찬 때 문재인 대통령의 건배사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였다.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상봉 정례화와 규모 확대는 물론이고 전면적 생사 확인 후 서신 교환이나 화상 상봉 등을 통한 접촉도 대폭 늘려야 한다. 이산가족의 나이를 감안하면 서둘러야 할 일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관계에서 가장 시급한 인도적 과제다.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동시대인의 도리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박완규 수석 논설위원